[한겨레21] 미투 시대 금기 '오빠 성폭력'


‘오빠 성폭력’ 기사에 실린 그림들은 실제 두 오빠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경험을 쓰고 그린 노유다 작가의 책 〈코끼리 가면〉의 삽화다. <코끼리 가면> ⓒ 노유다, 움직씨
시작은 Y(16)였습니다. ‘청소년 자해’(제1237~ 1239호)를 취재하면서 만난 Y가 최근 ‘오빠 성폭력’ 피해자라고 털어놨습니다. 부모님이 믿어주지 않는다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기에,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Y가 머물 쉼터를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놀랍게도 쉼터에는 Y 같은 아이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기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P와 K를 만났습니다. 곁에서 아이들을 엄마처럼 챙기던 A선생님의 눈물보가 터졌습니다. 선생님도 40여 년 전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빠 성폭력 피해자 4명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에게 훨씬 더 많은 피해자 얘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1981년 미국 정신과 의사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 초판이 출간되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유사 이래 광범위한 ‘사회적 공모’ 아래 숨기거나 외면해왔던 ‘근친 성학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1992년 의붓아버지 김영오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던 딸이 남자친구와 함께 김영오를 살해하면서 친족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친족 성폭력 중에서도 오빠 성폭력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금기’로 남아 있습니다. 성교육 강사들조차 청중이 워낙 불편해해서 차마 건드리지 못하는 주제라고 했습니다. 자녀 성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조차 자기 아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의심하는 것 같다며 언급조차 꺼린다고 합니다. 요즘엔 아빠 성폭력 사건에서 마지막 순간에 남편 대신 딸을 끌어안는 엄마가 꽤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이 가해자인 오빠 성폭력 사건에서, 엄마들은 백이면 아흔아홉 딸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 본능적인 ‘유기 공포’ 속에 피해자인 딸들은 침묵합니다. 전문가들이 오빠 성폭력을 ‘#미투 시대 금기’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금기로 치부되기 때문에 피해자 보호도 못하고 예방 교육도 할 수 없는 현실… 40년 전 A선생님과 40년 뒤 Y·P·K가 겪은 일이 똑같다는 <한겨레21> 기사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빠 성폭력 가정의 한 부모가 상담받으러 와서 실제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옛날엔 집집마다 아빠, 오빠, 작은아버지, 큰아버지한테 당하는 애가 얼마나 많았냐. 그래도 다 잘 지나갔는데 괜히 국가가 이런 거(상담) 만들어서 문제를 만든다.” 한 피해자 아이의 말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상처 난 손가락은 더 먼저 돌봐줘야 하는 거잖아요. 아들이든 딸이든 같은 자식인데, 오빠 성폭력 사건에서는 장남이라고 아들을 감싸고 집안 망신이라고 딸을 숨겨요. 상처 입은 딸은 ‘내 편이 없다’거나 ‘쓸모없는 존재’라는 서운함, 절망감, 분노 때문에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부모의 말도 아이의 말도 절망적일 정도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장형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거점) 부소장 겸 아주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말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습니다. 장 부소장은 2010년부터 해바라기센터에서 일했습니다. 10여 년 전 ‘사촌오빠 성폭력’ 사건이 들어오면, 가해자가 친가냐 외가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랐다고 합니다. 가해자가 외가일 때는 피해자 부모 양쪽이 딸을 보호하는데, 가해자가 친가 쪽일 때는 피해자 아버지가 애매한 태도를 보여 피해자 보호가 잘 안 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가해자가 친가든 외가든 상관없이 ‘사촌오빠 성폭력’은 대부분 피해자 중심주의로 해결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감췄던 금기를 꺼내 이야기를 시작하면, 10년 뒤 딸들이 오빠한테 당한 1차 피해보다 부모한테 더 큰 2차 피해를 당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까요?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한겨레21>은 ‘오빠 성폭력’ 취재 과정에서 형에게 성폭력을 당한 남동생 역시 생각보다 많다는 전문가들의 현장 경험을 전해 들었지만, 피해 당사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형 성폭력’을 공론화해주실 피해자와 관계자의 제보를 메일로(ggum@hani.co.kr) 받습니다.


*‘오빠 성폭력’ 피해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1인칭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40여 년 전 ‘오빠 성폭력’ 생존자입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에게 완치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는 잘 살아남았습니다. 가해자인 오빠는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와 오빠를 처벌할 수 없고 사실 저는 오빠를 용서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겪은 일을 나누려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저는 혼자 고군분투하며 괜찮아지느라 너무 오랜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남이 낸 길을 따라가려면 앞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사람을 못 믿었습니다. 저 혼자 길을 내면서 나아가느라 수풀을 헤치고 날카로운 풀에 베이며 돌아돌아 혼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저와 같은 고통을 겪는 아이들은 저보다 ‘경제적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를 도와줄 사람이 있으니, 나처럼 너무 먼 길을 돌아가지 말고 곧은길로 편히 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부모가 너를 지켜주지 못하더라도, 너를 도와줄, 나 같은 어른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이름과 얼굴을 모두 공개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까요. <한겨레21>에 덜컥 “#미투 하겠다”고 말해놓고는 충격받을 남편과 아이들 생각이 났습니다. 올케와 조카도 가족인데, ‘내가 갑자기 #미투를 하면 얼마나 놀랄까, 이게 무슨 연좌제인가’도 싶었습니다. 결국 익명으로 하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게 핏줄입니다. 죽은 가해자의 가족까지 걱정해야 하는 저의 현실, 이 ‘더러운 현실’이 친족 성폭력, 특히 오빠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큰오빠는 고2였습니다. 저는 엄마 아빠랑 안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엄마가 새벽예배를 가신 어느 날 방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오빠가 들어왔습니다. 제 입을 벌리고는 구강성교를 했습니다. 그다음은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 뒤로도 대여섯 번, 오빠가 방에 들어와 제 가슴을 만지거나 뒤에서 껴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유사강간에 그친 건 오빠가 삽입강간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40년 전, 비디오도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빠가 접할 수 있는 음란물이라곤 기껏해야 <플레이보이> 잡지였습니다. 요즘처럼 성관계 동영상이 판쳤다면, 당연히 삽입강간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교 때 그 상황을 스스로 재해석하면서 제가 너무 혐오스러웠습니다. 자문자답하면서 오빠가 그렇게 하는 동안 가만히 있었던 저를 자책했습니다. 소리 지르고 화낼 수도 있었는데,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었던 제가 너무 추하게 느껴졌습니다. ‘너도 즐긴 거 아니야? 그 상황에서 네가 잠자고 있었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어.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어?’ 그것이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나타나는 ‘인지 왜곡’이었다는 건 어른이 된 뒤 심리학을 배우면서 알았습니다.

왜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으실 겁니다. 요즘에야 엄마랑 딸이 친하니까 그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을 오늘날 생각으로 묻는 겁니다. 저는 1960년대 2남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남아선호 사상이 너무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특히 장남인 큰오빠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습니다. 아들한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억눌린 걸 다 저한테 푸셨습니다. 아주 포악하게. 엄마한테 많이 맞았고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엄마한테 말하면 “이노무 기지배” 하면서 저를 더 때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풍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집은 부모 자식 간에도 어리광 피우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무서운 엄마한테 “오빠가 내 입을 벌리고 …했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왜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았느냐고도 묻고 싶으실 겁니다. 그런 동시 들어보셨을 겁니다. “엄마는 밥 주고 강아지는 귀엽고 아버지는 왜 있지?” 하는 동시. 우리 아버지가 딱 그 동시에 나온 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공무원으로 평생 일하셨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분이었습니다. ‘여섯 시 땡’ 퇴근하면 집에 와서 밥 먹고 자기 방에 칩거하셨습니다. 책 보고 글 쓰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왜 있나’ 이런 생각을 하는 마당에, 아버지에게는 그런 말을 더더욱 할 수 없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40년 만의 #미투에 엄마는 “그럴 리 없다”


오빠는 성적으로만 저를 학대한 것이 아닙니다. 때리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저를 수시로 때리니까, 오빠도 저를 때려도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힘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는 오빠 음식에 침 뱉기였습니다. 라면을 끓여다주면서 몰래몰래 침을 뱉곤 했습니다. 전에 제가 상담소에서 일할 때 어떤 엄마가 어린 딸을 데려왔습니다. 애가 자꾸 오빠 음식에 침을 뱉는다고요. 엄마는 아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딸이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데려왔습니다. 저는 아이의 눈빛과 표정을 딱 보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상담해줄 범위를 벗어나는 상태여서 엄마한테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잘 치료할 수 있는 정신과 전문의를 조용히 소개해줬습니다.

두 번째 복수는 2년 전 오빠가 말기암 판정을 받았을 때 했습니다. 임종 직전까지 병문안을 안 갔습니다.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오빠)는 죽어도 싸다’는 마음인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때도 엄마가 “너처럼 내찬(마음이 차가운) 기지배는 세상에 없을 거”라고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큰오빠가 죽어가는데 어떻게 한 번을 들여다보지 않느냐고, 오빠가 너 때문에 어떻게 편하게 눈을 감겠느냐”고요.

오빠를 보내놓고 엄마가 저한테 전화를 거셨습니다. 또 욕을 하시려고요. 참다참다 울면서 40년간 담아둔 얘기를 털어놨습니다.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 줄 알고나 그러는 거냐”고 따졌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엄마가 대뜸 “걔가 너 타고 올랐냐?”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의 직감이 있었나 싶기도 했습니다. 엄마한테 “그 인간이 엄마 새벽예배 갔을 때 나한테 그랬다”고만 말했습니다. 차마 뭘 어떻게 했는지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그럴 리 없다”고, “내가 그 시간에 방을 비운 적이 없다”고, “아버지도 방에 계셨다”고, “걔가 너한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우기셨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신 날, 엄마가 새벽예배 갔을 때 벌어진 일인데도요. 엄마는 끝까지 살아 있는 딸보다 죽은 아들 편을 드신 겁니다. 엄마한테는, 그 뒤로 지금까지 다시 그 얘기를 꺼낸 적이 없습니다.


그 일 이후 생긴 결벽증과 공격적 성향


운명처럼 친족 성폭력 피해자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수년간 아빠와 오빠에게 너무 끔찍한 일을 당한 아이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 아이들에 비하면 ‘삽입강간도 안 당한 나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폭력 횟수와 기간, 정도만으로 따질 문제는 아닙니다. 저는 기질이 민감하고 까다로운 아이였습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한 번의 충격이라도 충분히 평생을 갈 수 있습니다. 너무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성을 알게 된 것이 제 인생에 두고두고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저는 병리적일 정도의 결벽증이 있습니다. 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평소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 아닌데, 유독 결벽증처럼 그럴 때가 있으니까요. 그 일 이후, 오빠가 너무너무 징그럽고 구강성교로 성을 배웠다는 게 구역질이 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남자는 나한테 해를 끼치는 존재로 각인됐습니다. 남자를 믿을 수 없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뿌리 깊이 박혔습니다. 키 큰 남자를 보면 ‘멋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저 주먹에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비현실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연애해야 하는데, 정상적인 연애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결혼은 이십 대 후반에 일찍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결혼을 안 하면 엄마가 너무 부끄럽겠구나’ 싶어서 서둘렀습니다. 엄마가 너무 고루하고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제가 떠나줬습니다. 제 남편은 착한 사람입니다. 오랜 시간 지켜봐온, 나를 해하지 않을 것 같은 착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신혼 초에 덜컥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후로는 죽을 둥 살 둥 책임감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지금은… 남편과의 성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오빠에게 당한 일 때문인지 남편과 성적인 관계가 늘 불편했습니다. 남편이 형제 같고, 근친상간처럼 느껴집니다. ‘가족끼리 왜 이래’라는 개그가, 저한테는 현실이고 공포입니다. 남편한테는 오빠한테 당한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네가 그래서 그랬구나’ 저를 무시할까봐, 부부싸움이라도 할 때 우리 집안까지 무시할까봐 말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성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반대로 너무 일찍 성에 눈떴습니다. 중학교 때는 성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신문을 집에 쌓아두고 보셨습니다. 신문에 실리는 야한 연재 소설을 매일매일 훔쳐 읽는 게 저의 유일한 취미였습니다. 소설과 함께 실리는 성관계 하는 그림만 보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지금이야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40년 전입니다. 주변 여학생 중에 저 말고 그런 애가 없었습니다. 그 시간에 고전문학을 읽었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됐을 텐데… 제 인생에 엄청 큰 손해였던 것 같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죽는 순간까지 오빠는 “미안하다”는 말 안 해


성적인 관계 외에 인간관계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그렇게 ‘성격 더러운 애’는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냥 말’로 받아들이질 못했습니다. 항상 과각성 상태에서 남의 말을 확대해석해 받아들이고, 공격적으로 되받아치는 성향이 생겼습니다. 과도하게 세게, 과도하게 매몰차게 말했습니다.

제가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으니까, 어떤 분이 “상담 좀 받아봐”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지금 같았으면 그렇게 과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땐 너무 참을 수 없는 욕처럼 들리고,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그날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빨리 뛰어내려, 빨리 뛰어내려’ 하는 악마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애들도 다 컸고 나 하나 죽는 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별말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오빠도 용서했는데, 사실 저한테 그 말을 한 사람은 아직까지 용서가 잘 안 됩니다.

마흔 넘어서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상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상담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여태까지 ‘행복한 가정’에 대한 미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왜 나만’ 하면서 불행해했을 것입니다. 상담 공부할 때 가계도를 그려 분석해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저를 학대한 엄마, 가해자인 엄마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도 할머니에게 받은 게 너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너무 텅 빈 사람이 제 엄마가 됐고, 줄 게 없는 사람이니까 저한테 못 줬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 나는 나이 쉰이 될 때까지 메마른 젖을 빨려고 했던 거구나, 어차피 먹지도 못할 젖을 먹으려고 미련하게 끝까지 기를 썼구나’ 싶었습니다. 그걸 알고 나니 해방감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엄마가 딱하게 여겨졌습니다. 엄마 눈감으시기 전에 많이 베풀어드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전엔 죽는 게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훨씬 낫구나 싶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오빠 임종을 지켰습니다. 엄마가 새벽예배 갔을 때 저한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오랫동안 ‘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하나님 음성’ 비슷한 걸 들었던 것 같습니다. ‘너 빨리 오빠한테 가야 해!’ 애들 데리고 오빠 면회를 갔습니다. 죽어가는 와중에 오빠가 우리 애들한테 “삼촌이 병원 나가서 좋고 예쁜 글 써줄게”라고 했습니다. 저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지 않았으면서요.

오빠는 저를 만난 뒤 의식을 잃었습니다. 마치 생의 마지막 임무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마침 엄마도 볼일 보러 나가신 때였습니다. 병실에서 저 혼자 한 시간 가까이 임종을 지키게 된 겁니다. 제가 아버지, 시어머니 임종도 다 지켰습니다. 죽음의 과정을 여러 번 목격했는데, 오빠는 유독 고통스럽게 떠났습니다. 정말 무서운 걸 보는 사람처럼, 뭔가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정말 무섭게 소리를 지르면서 죽어갔습니다. 세상을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점토로 만든 작품. 가운데 홀로 주먹을 불끈 쥔 피해자와 위에서 둘쨋줄 왼쪽에서 네 번째 눈을 크게 뜨고 놀란 가해자의 모습. 피해자는 다음에 가해자가 다시 방에 들어오면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지를 거라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치유자로


장례식장에 오빠 회사 사람들이 왔습니다. 동료들은 오빠가 평소 빈속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지인들이 “안주 안 먹으면 술 안 준다”고 했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엄마의 과도한 집착, 오빠의 예술적 감수성, 친족 성폭력 가해자라는 죄의식이 오빠의 불행한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건강도, 가족도 돌보지 않고 그렇게 막살다가 오십 대에 암으로 쓰러졌으니까요. ‘그 인간(오빠)도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구나, 나도 감옥 그 인간도 감옥에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은 오빠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서가 다른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까지는 아니고,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 그게 용서 아닐까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저는 너무 많은 에너지와 너무 긴 시간을 썼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별로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상처받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이 제 운명인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신의 섭리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너는 죽는 거보다 사는 게 낫다는 걸 몸으로 알았잖니. 네가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고 내가 너한테 얼마나 공들였는지 아니? 너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겠니!’ 그 음성에서 잃었던 신앙을 다시 찾았습니다. 요즘은 아이들과 같이 밥 먹을 때도 “너무 맛있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감을 느끼려 합니다. 남편도 제 인생이 변했다고 합니다.

제가 돌보는 아이들한테도 이 얘기를 꼭 해줍니다. 좋은 부모님, 우애 있는 형제… 너희에게 없는 것은 일단 생각하지 말자고 합니다. 미련을 버리라고요. 대신 주변을 돌아보면 학교 상담 선생님을 비롯해, 제가 혼자 고군분투하던 옛날보다 훨씬 ‘자원’이 많습니다. 1366(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긴급 전화상담과 보호)이나 해바라기센터(성폭력·가정폭력 상담, 의료, 심리치료 지원)에 연락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집에 있을 수 없을 땐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을 장기간 보호·지원해주는 쉼터도 있습니다. “헬프 미”(저를 도와주세요)라고 외치고, 그런 자원을 최대한 이용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근친상간 아닌 근친강간


친족 성폭력 가정의 부모님들한테도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근친상간’이라는 언어가 주는 구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끝까지 더 말을 못합니다. 그런데 아빠와 딸, 오빠와 동생이라는 권력관계가 엄연합니다. 어떻게 ‘상간’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가정 내 권력관계를 생각해보면, 근친상간이 아니라 명백한 근친‘강간’입니다. 딸에게 피해 사실을 들으면 두렵고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나도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고,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도 못했지만 그렇게 됐다고 말입니다. 딸에게 “사랑한다”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안하다”고는 꼭 해주세요. 현실을 부정하고 딸에게 ‘가족의 비밀’을 지킬 짐까지 지우는 건 부모가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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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one should face a mental health cahallenge alone.'